이리니 습작/작은 깨달음

나이가 불혹에 가까워지면 뒤늦게 깨닫는 사실들 I

이리니 2009. 11. 24. 08:00


少年易老 錢難成 [소년이로 쩐난성] 
 
송(宋)나라 대유학자 구라(歐羅)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풀자면,
소년은 쉬이 늙고, 돈은 모으기가 어렵다.
란 뜻으로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열심히 돈을 모으란 뜻이 되겠다. 험... 구라는 여기까지!


 세월은 참으로 유수처럼 흐른다. 대학을 가겠답시고 - 목표는 당근 쉬옷대 - 발버둥치고 또 치다가 어찌어찌 기역(ㄱ)대학[각주:1]을 들어간지가 엊그제 같다. 캠퍼스에 입학한 당일, 서울 여자는 이쁘더라...는 '카더라 통신'이 말짱 구라였단 사실을 깨닫고 대(大)성통곡을 넘어 태(太)성통곡 한지는 어제 같다. 헌데 이제 몇 년만 더 열심히 밥을 먹으면 불혹의 중년 사내가 되게 생겼다.

 여기까지 오면 반드시 이런 생각을 내는 삐딱선이들이 있다. 
나이 먹은게 자랑이냐...?

 그런 분들께 이런 포효를 선물해 드리고 싶다. 
너네가 나이 맛을 알아...!! ??

 
'나이 맛'이란...?

 요상하게도 이 세월이란 녀석은 육체의 노화라는 슬픔과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이란 선물을 동시에 주는듯 보인다. 20대에 시작, 30대 중반까지, 그 지혜와 깨달음을 찾아 계룡산, 속리산, 지리산[각주:2] 안 가 본 산이 없이 찾을 적엔 오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드니까 소록소록 저절로 찾아오더라는 말이다.

찾고 찾고 또 찾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들어 조금씩 고요해지니 저절로 드러나더라는 말이다.
 
 이리니는 이 오묘함을 일러 '나이 맛'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오늘 이 글은 이리니가 직접 '나이'를 담가, 잘 숙성한 후, 직접 맛을 본 '나이 맛'을 공유하기 위한 글이 되겠다. 


세월이 선물해 준 깨달음 PART. I

1. 남는건 가족 밖에 없더라.

 그 놈의 돈, 그 놈의 돈 거리며, 밥벌이를 해줄 직장에 매여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어느날 갑작스레 직장 동료라 불리는 이들 외에 친구가 없어져 버렸음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연락해 한번 만나볼라치면 누구나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치여, 한마디로 '돈'에 치여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간만에 휴일이라 좀 더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해보려 하지만, 너무 피곤하다. 간만의 휴일... 자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다. 자신의 얼굴에 생긴 주욱 그어진 주름을 발견하게 되는 날. 자신의 주변에는 가족 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아무리 싫은 짓을 해도, 자신의 곁에는 늘상 가족들이 있어 왔음을 발견한다.

 예전의 친구들도 갔다. 왕년의 직장동료들도 갔다. 과거의 연인도 가고 없다. 오직 가족만이 남아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거다.

 이 때 불현듯 이런 깨달음이 솟는다. 
이제는 내가 이들을 지켜줄 차례다. 이제는 내가 이들을 사랑해 줄 차례다. 


2. 아버지와 어머니는 초인이 아니더라.

 어렸을 때, 부모란 존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해 주었던 초인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는 땅을 파서 돈을 걷어 올리는 초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말만하면 '오냐'하시며, 무슨 요구든 들어주시는 초인이었다. 

 어렸을 적 이런 인상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 인간들은 좀처럼 자신의 부모가 늙어 간다는 것과 그와 동시에 약해져 간다는 사실, 그리고 순간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가지 못할 육체적 죽음이라는 관문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언제 눈치를 채게 될까...?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을 때, 부모의 노화를 눈치채고
우리는 자신이 약해져 간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을 때, 부모의 연약함을 눈치채게 되며,
우리는 자신이 초인이 아닌 일개 인간일 뿐임을 자각하게 됐을 때, 부모의 인간으로서의 고초를 눈치채게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됐을 때... 
 그들, 우리의 부모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늙어있고, 약해져 있다.

 눈물짓지만 말고 이렇게 믿어보자. 이렇게 되내어보자. 
너무 늦지는 않았어! 
 
3. 안 되는건 안 되더라.

 어렸을 적부터 인간들은 참으로 많은 꿈을 꾼다. 자면서도 꾸고, 생시에도 꾼다. 어렸을 적 소박했던 꿈이 20-30대 무렵에는 야망과 야심으로 무섭게 자라난다. 모두가 그 꿈, 그 야망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주를 병나발 불고, 하늘에 삿대질을 해대며 이러는거다.



에이, 빌어먹을 세상. 
에이, 더러운 내 팔자.
에이, ZOT 같은 정치인들.
에이. 에이. 에이...
 어떤 이들은 이런 푸념을 평생 달고 살기도 한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럴지 모르지...

 하지만 운이 좋거나, 좋은 책을 만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스승을 만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의문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솟아 오를 수 있다.   

세상이나 삶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내 가슴, 내 내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20대 때 이런 소리를 분명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상투적이며 고리타분하다...라고 믿었다. 그럴 수 밖에... 가슴에 와 닿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와 닿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삶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직 문제는 내 마음, 내 가슴 즉, 나 자신이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 속, 가슴 속 욕심을 줄여 나간다. 조금씩 조금씩 오만함, 건방짐의 허리를 숙여 나간다. 
 
 욕심과 욕망이 줄어감에 따라,
 건방과 오만이 감소함에 따라,
 세상과 사람, 삶은 점점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종국에는 알아 버리는거다.
세상과 그네들, 나 자신과 나의 삶은 원래부터가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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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가 있으실까봐... 아직 이리니가 불혹은 아니에요. 다가가긴 하죠... 즉, 아직 33한 30대라는 말씀 ^^
  1. 고대 아님. 당시 이리니가 살았던 촌동네에는 '고대엔 여자가 없다'란 섬찟한 소문이 돌았음. 물론 고대갈 실력도 없었음. 갔으면 연아랑 동기 먹는건데... [본문으로]
  2. 도(道)를 찾아서라기 보다는... 음... 그냥 MT로... ^^;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