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니 습작/이리니의 사연

버스서 자리 양보하고 봉변 당한 사연

이리니 2009. 5. 25. 09:30


 어느 한적한 오후였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다행히도 사람들이 많이 없더군요. 버스의 뒷바퀴 부분에 있는 볼록 튀어오른 좌석을 선호하는데, 마침 그 자리가 비어있어 냉큼 앉았습니다. 이 자리의 특징은 키가 크신 분은 많이 불편한 반면에, 키가 작은 사람에겐 안정감이 있어 조용히 한숨 자기가 참 편한 자리입니다. 다리를 볼록 튀어오른 자리에 잘 붙이면 참 안정적이거든요.^^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 눈을 감고 쉬기보다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차에, 앞문을 통해 승차를 하시는 할머니 한 분을 보게 됐습니다. 얼굴에 주름이 많으신 걸로 봐선 할머니가 분명한데, 옷은 울긋불긋 화려했고, 얼굴에도 짙은 화장을 하셨더군요. 가까이 오셨을 때 자세히 보니,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연세가 적고, 아주머니라고 하기엔 연세가 많아 보이셨습니다. 짙은 화장을 하셨으니, 그 주름이 더욱 선명해 보이더군요.

 바깥의 청명한 광경을 보고 나선지, 기분도 좋았고 몸도 상쾌해서,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버스 뒤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는 웃는 얼굴로 일어나 자리를 권했습니다. 근데 이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할머니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치시는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뭘하는 거예요? 내가 왜! 내가 왜 거길엔 앉아요? 당신이나 앉아요! 참 이상한 사람이네...

 얼굴에는 온통 황당, 당황, 억울이라는 표정을 지으시곤, 마치 아주 큰 모욕이라도 당하신 것처럼, 저에게 큰 소리를 치시는 겁니다. 그 눈은 마치 '뭐 이런 미친 넘이 다있어?'라고 말하는것 같더군요. 그리곤 끊임없이 '이상한 사람이네..'란 말을 중얼중얼 하시는 겁니다. 대략 난감. --;

 조용하던 버스 안에 큰소리가 나고, 할머니 한 분이 한 손을 치켜드시며 저를 손가락질까지 하고 계시니,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은 절 뚫어져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을 하시던 기사분도 무슨 큰 일이라도 났나 싶어 연신 거울로 뒤를 돌아보시더군요. 

 선의를 가지고 자리 양보를 했는데, 졸지에 이건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할머니는 정말 저를 죄인보듯 하시더군요. 영문을 정확히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제가 연세 많은 할머니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겠지라며 뾰족한 눈초리로 저를 아래 위로 힐끔거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휑한 버스 한가운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뻘쭈미 서있는 저. 하필이면 사람 수도 딱 맞아서 서 있는 사람은 그 할머니와 저 두 사람 밖에 없더군요. 등에는 식은땀이 흐리고, 머리 카락이 곤두섰습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더군요. 그렇다고 다시 덥썩 그 자리에 앉자니, 그 모양새가 더 이상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뻘쭈미 서 있는데, 그 할머니의 눈초리는 점점 더 사나와 졌습니다. 마치 저를 찢어 죽이겠다는 눈초리더군요. '그 이상한 사람이네...'라는 후렴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춤주춤 움직여 그 할머니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뒤, 있지도 않은 창 밖의 먼산을 바라 보는척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저를 찌를듯한 그 할머니의 눈초리와 사람들의 시선이 저의 뒤통수와 등을 찌르는것 같더군요. 참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제가 뭘 잘못했는지를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뭐였을까요? 제가 뭘 잘못 했을까요? 제가 먼 산을 보는척하며 궁리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그 분의 연세는 할머니치곤 적고, 아주머니치곤 많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늙었다'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죠. 심지어 손자, 손녀를 보고선 기뻐하다가도 그들에게서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되면 서글퍼 하는 것이 사람이니까요. 아마 그 분은 스스로 '늙었다, 할머니'라는 소리를 완전 부정하고 싶었을 겁니다. 자기는 아직 젊다고 믿고 싶은 것이죠. 아마 그 증거가 위에서 언급했던,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데 저는 눈치없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고, 이 행위는 아마 그 분께 상당히 불쾌하고 모욕적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곰곰히 따져보니, 물론 많이 섭섭했지만, 그 분의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요. 

 여러분들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 하실 때, 이런 부분을 한번쯤 고려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연세가 많은 분들께 '경로'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분명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께는 지독히도 불쾌하고, 모욕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아셨나요? 
[ 쯥, 이 인간들은 좀 맞아야 겠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곤욕 아닌 곤욕을 치뤄 억울하다는 느낌도 잠시, 좋은 교훈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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