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니 습작/오류 깨기

한국 최초의 '초식남 인터뷰'

이리니 2009. 6. 3. 08:30


 평소 죽이 잘 맞아 예전부터 짝짜꿍을 하고 지냈던 후배 N군을 오랜만에 만났다. 누가봐도 호남형인 이 녀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수한 여성들의 대쉬를 과감히 뿌리치며 자신의 개인사에만 몰입함으로써, 남자들에게는 불타는 질투를, 여자들에게는 한맺힌 눈물을 선사해 온 재수없는 인간이었다. 왜 친하게 지내냐고? 이 녀석의 센스와 유머가 아주 일품이다. 같이 수다를 떨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 가진 바 스트레스를 모두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호감형 외모 + 유머 + 센스)인 녀석이 '여자에게는 관심없어!'를 노래하니, 참으로 시대적 낭비가 아닌가 말이다.  

 둘 다 술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편이라 간단하게 생맥주를 시켜놓고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미남들의 수다가... 


 너 초식남이냐?  

 

초식남이란? 


초식남(草食男) 또는 초식계 남자(일본어: 草食系男子(そうしょくけいだんし))는 일본의 여성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深澤真紀)가 명명한 용어로서, 기존의 '남성다움'(육식적)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자신의 취미활동에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동성애자와는 차별된 남성을 일컫는다.




L : 이리니, N : 초식남

L : 너 초식남이라고 아냐?
N : 예. 
L : 너, 스스로 초식남이라고 생각진 않아?
N : 음... 상당히 비슷한거 같긴해요. 
L : 비슷? 내가 봤을 때, 너는 완전 초.식.남 이거든?
N : 그만해요, 사람 말로 몰아 붙이는거... 
L : 내 취미가?
N : 말로 까기. 말로 씹기. 말로 먹기.
L : 알면서...
N : 예, 예. 제가 초식남이라고 쳐요. 근데 왜요?
L : 블로그에 네 얘기 좀 올릴려고. 키키키.
N : 네? 제 얘기를 왜요?
L : 재밌으니까. 그래도 걱정마. 실명 쓰는건 아니니까. 
N : 아무리 그래도... 


상당히 길고 지루한 작업이 이어졌다. 어르기. 달래기. 쌩까기. 조르기. 누르기. 업어치기. 매치기까지...
그토록 거부하던 녀석이 술이 조금씩 되면서부터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곤 대뜸 이러는거다. 

N : 대신 제가 꼭 여자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데, 그걸 빠드리지 않고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약속해줘요.  
L : 음? 무슨 일인데?
N : 형도 알다시피 저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요. 어릴 때 철없이 여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던게 마음에 걸리네요.
L : 왜? 덮쳤니?
N : 에이, 정말!
L : 아, 아... 농담, 농담.
N : 휴... 그런게 좀 있어요. 
L : 좋아.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지. 
N : 뭐 딱히 할것도 없는데, 이것도 재밌긴 하겠네요. 뭐예요? 궁금한게...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초식남 인터뷰가...

L : 너 정말 그렇게 여자가 싫어?
N : 싫긴요, 좋죠. 저도 남잔데...
L : 그럼?
N : 단순히 말하자면, 이성보다 더 흥미와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고, 거기에 꽂혀있는 거에요. 
L : 그러니까... 여자도 좋아하지만, 여자보다 더 사랑하는게 있다? 뭐 그런 뜻?
N : 그렇죠.
L : 그게 뭔데?
N : 그거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죠. 누구는 게임일 수도 있고, 누구는 일일지도 모르죠...
L : 일? 여자보다 일을 더 사랑한다? 그런 미친넘이 어딨어? --^
N : 형이야 당근 이해를 못하겠죠. 그럼요... 암요... 
L :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근데 이성보다 자신의 관심사에 그렇게 꽂힐 수도 있는건가?
N :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죠. 예상보다 많을지도 몰라요. 특히 요즘처럼 개인화가 심한 시대라면...
L : 개인화라... 그것도 그러네. 넌 뭐에 꽂혀 있는데?

 
여기서 잠깐 녀석의 개인사가 이어졌다.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 글에서는 생략한다.

L : 그럼 결혼은?
N : 솔직히 잘 몰라요. 거기에도 별 관심이 없으니 생각을 안하는거죠. 
L : 초식남들이 다 그럴까?
N : 그걸 어떻게 알아요?
L : 근데 너 어떻게보면 정말로 단순한거구나? 오직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그렇게 들고 파니...
N : 쩝, 그럴지도 모르죠.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이리니는 이리니대로, 후배는 후배대로 생각에 잠겼으니까...

L : 근데 너, 아까 블로그에 글로 올리고 싶다는 내용이 뭐야? 여자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 여자들한테 인기 좋았잖아? 그런데도 한사코 뿌리친게 도대체 몇번이었냐? 솔직히 옆에서보니 좀 재수 없더라...
N : 형은요...
L : 내가? 내가 언제? 임마, 나는 그냥 눈이 높은거야! 너랑은 달라. 완전 달라! 난 육식남이라구! 
N : 네, 네, 그러시겠죠. 언제나 껄떡이는 육식남. 키키키.
L : 에라이, 후라이 같은 자식. 너, 술 깼구나? 말로 맞상대하는걸 보니...
N : 술이 깨네요. 예전 생각하니까...
L : 너 오늘 좀 이상하다?
N : 얘기했잖아요. 나도 나이 먹어간다고...


여기서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대화의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분위기 파악 아니던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고, 진중히 인터뷰를 진행했다. 

L : 얘기해봐. 
N : 형도 알죠? 예전 학교 있을 때부터, 여자들 대쉬가 간혹 있었다는거...
L : 알지. 
N : 그 때 제가 어떻게 했는지도 대강 알죠?
L : 음. 대강. 
N : 형이 대충 봤을 때는 어땠어요, 제가?
L : 음... 솔직히 말해도 되냐?
N : 네. 
L : 무시? 잔인? 모욕?
N : 예, 바로 그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에서 정말 이 녀석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그와 동시에 철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L : 여자애들이 너 좋다고 했을 때, 좀 친절하게 해줄 수는 없었냐? 그렇게 매몰찰 필요가 있었을까?
N : (담배를 피워 물며) 후... 어려서였겠죠. 고집도 셌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치기...
L : 싫어서 그랬던건 아니고?
N : 싫다, 좋다도 없었을 때예요. 그냥 무관심 했던거죠, 다른데 꽂혀 있었으니까요... 
L : 그럼 좀 친절하게 거절을 할 수도 있었잖아?
N : 형은 그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해요? 친절하게 거절하는게?
L : 응?


 여기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여인이 용기를 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온다. 하지만 남자는 딱히 이성을 사귈 생각이 없다. 그래서 거절을 한다. 그것도 친절하게, 되도록이면 상처없이... 이게 가능할까? 이리니는 절대적 경험부족으로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아시는 분은 댓글을... ^^

L :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군거야?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N : 이상하게 그 당시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 마음을 고려한다는 것조차 귀찮았던거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군요, 뭘 어떻게 해야할지... 그래서 '에이! 귀찮아!' 라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어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철이 없을 수 있는지... 휴...
L : 한마디로... 단칼에 그냥 잘라 버리겠다? 
N : 맞아요. 정을 단숨에 끊는게 낫겠다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충격이 크겠지만, 제일 깨끗하다고...
L : 근데?
N : 그 충격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어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휴...
L : 상처가 됐다?
N : 예, 아주 큰...


공기가 아주 무거웠다. 설마 이 녀석 울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L :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N : 아무래도 직접가서 사과할 수는 없겠죠? 이제는 어디 사는지도 모르니...
L : 그... 그렇지. 세월이 꽤 흘렀잖아?
N : 형이 글로 한번 써봐요. 저같은 '잔인한 남자'에 대해서요. 잘하면 한 몇만명씩 본다면서요?
L : 운이 좋으면. 내 맘대로 되는건 아니고.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잔인한 남자'는 좀...
N : 초식남이 초식동물과는 다르게 아주 잔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의도해서 그런건 아니란걸 좀 알려줘요. 사과와 함께...
L : 초식남이 의도와는 다르게 잔인할 수 있다? 
N : 네, 그리고 여자들에게 얘기를 좀 해줘요. 일부러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어려서, 잘 몰라서, 철이 없어서 그럴 때도 있다는 것. 상대방 이성이 꼭 싫어서 그러는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두요. 물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L : 너, 진심이구나?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N : 나이가 드니까 알겠더라구요. 제 안에도 꽤나 많은 상처가 있다는거. 간혹 잠이 안 오거나 할 때, 그 상처가 불쑥불쑥 나오곤 하는데, 어떨때는 어찌나 힘이 드는지... 그러다보니 알게 되더군요. 걔네들도 저 때문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L : 너도 그러냐? 나도 간혹 잠 안 오거나 하면 불쑥불쑥 예전 생각나면서 잠 설치곤 하는데... 휴...



 마무리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따로 글을 작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궁리 끝에 그냥 후배와의 솔직한 대화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후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긴 글을 마치자. 

1. 초식남은 사실상 존재한다.
2. 초식남은 여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보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빠져있다.
3. 여성이 초식남에게 호감을 느끼고 대쉬를 할 경우, 초식남은 좋고, 싫고를 따지지 않을 때도 있다. 한마디로, 여전히 자기가 빠져있는 곳에만 몰입할 뿐, 다가온 여성에게 그냥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4. 여성의 대쉬가 어리고 철없는 초식남에게 이루어질 때, 이 초식남의 대처는 대단히 미숙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상대 여성은 그 미숙한 대처로 상처를 받을 수 있다. 
5. 초식남의 냉혹, 잔인한 거절은 '나 너 싫어!'가 아니라 '나는 다른데 더 관심 있어!' 일 수 있다. 
6. 이런 미숙한 초식남의 대처는 여성들이 생각 또는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성들은 아실 필요가 있다. 
7. 이런 이해를 통해 여성들의 큰 상처는 작은 상처로, 작은 상처는 어쩌면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8. 미숙한 초식남이 성숙한 후에야 몰랐던 많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리고 사과하고 싶어한다. 여성분들에게 상처를 줬던 많은 남성들도 성숙한 후, 그럴지도 모른다. 
9.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남성도 미숙한 여성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미숙한 여성이 성숙한 후, 후배 초식남과 같은 후회를 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이 초식남 후배와 관련된 몇가지 사연도 준비 중인데, 이 녀석이 좀체로 허락을 해주질 않네요. 여러분들의 반응이 좋다면 은근슬쩍 허락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에 난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길 기대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평안하시길... ^^